북한의 김일성은 무력통일이라는 방법으로 남한과 결합 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과 소련의 힘을 빌렸고, 치밀한 계획 하에, 6월 25일 새벽 전쟁의 총소리를 울리게 된다.
1.개전시의 조선인민군
1948년 남과 북은 주체적인 국가를 설립하면서, 각각 북진 통일론과 국토 완정이라는 모토 하에, 노
북한의 인민군은 1948년 2월 8일에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4월 25일에 아주 성대한 창군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북한에서 조선인민군의 전통을 이른바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기 때문으로 앞서 이야기 한바 있는 1932년 4월 25일에 김일성이 유격대를 조직하
장악
(2) 9월 28일에 서울수복
(3)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
(4)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
4.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1) 김일성의 중국군 개입 유도
- 마오쩌둥은 한국 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음.
북한의 준비가 더 충분했으며, 방선주의 자료는 북측의 남쪽 진격을 입증해주며, 한국군의 공격에 응전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전국적 전쟁은 북한인민군의 전면적 공격으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소련의 태도
북한의 이 행동은 북한 단독의 판단인가, 아니면 소련 중국과의 협의
전쟁 시작 전 작전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북한은,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쪽의 친북 세력이 호응하여 통일이 금방 완수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이 실패로 끝났고, 이러한 상황을 보면, 소련 군사고문의 수준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군사적 능력이 높은 연안계가 참여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