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법자강운동을 중국 근현대사라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배정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가 남아 있다.
먼저, 변법론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중국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청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한인 관료층의 주도로 양무운동이 한창이었다. 중체서용의 비교적
중국 청나라는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의 전쟁을 겪으면서 양무운동(洋務運動) 의 결함이 폭로된 이후 개혁의 필요가 급속히 고조되었다.
변법운동의 목표는, 어린 광서제(光緖帝)를 옹립, 그 통치하에서 입헌제·의회제를 채용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러시아 표트르대제 의 신정(新政)
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사회 ·정치체제의 근대화는 등한시되었고, 때마침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에서 뼈아픈 타격을 받아 그 약체성이 노정되었다. 이리하여 구체체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운동의 지도자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 양무운동이 중국 자본주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신민주주의혁명만이 성공하였다. 여기서 1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여러 가지 형태의 혁명과 개혁 운동을 살펴보고 또한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신민주주의혁명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의 혁명을 아편전쟁, 태평천국, 양무운동, 무술변법, 신해혁명, 의화단운동, 그리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