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한 다음, 개화를 주도할 관서로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하고(12월),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 중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을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 소개서들을 포함해 3천여 종 4만여 책의 중국서
서양식 세계 지도는 구형 지구에 대한 개념과 중국 중심의 직방 세계를 넘어서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전해 주었다. 구형의 지구는 대다수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방 세계 바깥의 넓은 세계는 서양의 세계 지도가 묘사하듯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으며
반응을 보였으며 특히 과학기술이 4개현대화(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을 이룩함에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식한 등소평이 중국과학원을 정돈하고 지식인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려는데 지식인들은 환영을 표하면서 등소평을 지지했던 것이다.
둘째, 4인방이 그동안 대중
서양철학에 대한 거부감이 둔화되어갔고, 중국과 일본의 번역서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는 곧바로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서양인 ‘양이(洋夷)’로 규정하고 서양의 근대기술을 ‘곡기(曲技)’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이
중국, 일본을 이루는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이 동양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으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동양이 서양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대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