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고종이 친정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친정에 나선 고종은 개항․개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 아래 1876년 개항을 단행한 다음 1880년부터 개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880년 수신사 파견을 통해 일본의 개화 실상을 확인한 다음, 개화를 주도할 관서로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하고(12월), 1881년
년〈신식화폐발행장정〉을 조선정부로 하여금 제정, 실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는 제도적 모순과 일본의 화폐권 침탈 시도에 대한 정부당국자들의 반발 내지 저항으로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01년에 이르러서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을 지키려는 정부와 지식계층의 저항, 정부도 재
대한으로 개정하여 내외에 선포한다. 그 결과 마침내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대한제국정부는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의 원칙을 세워 개혁을 펼쳐 나간다. 일본에 기대어 개혁을 급격하게 단행한 갑오적원의 방식을 반성하고, 주체적으로 서양의 법
독립협회가 주로 상류층에 속하는 신 지식층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 계몽 운동과 민의(民意)를 정치에 반영하도록 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개혁에도 많은 힘을 기울인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창설 된지 단 2년 만에 독립협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개혁은 일본이 삼국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으나, 박영효가 명성황후 민씨 일파에 의해 제거되어 중단됨
1895년(고종 32) 1월 제정·발표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성격의 문서
공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청(淸)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자주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