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고종의 대한 긍정적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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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대사] 고종의 대한 긍정적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1)개항초기
2) 『한성순보(漢城旬報)』, 『한성주보(漢城周報)』
3) 청일전쟁 前 대외인식
4) 일본의 내정 개입과 고종의 반응
5) 청의 쇠퇴와 독립추구
6) 아관파천
7) 서양인들의 비춰진 고종

3.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우리 역사에 부정적 인식은 1910년의 ‘병합’의 충격에서 비롯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근대적인 사회를 스스로 만들 힘이 없었던 민족으로 생각하는 식자들이 많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은 특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역사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조장되어왔다.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뿌리가 깊어진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8․15해방 이후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맞는, 필요한 이론은 당연히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얻어져야 하며, 우리의 경험의 축적인 우리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 여기서는 우리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무능하고 유약한 임금이었던 고종의 대한 평가를 재조명하면서 결코 고종이 유약한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2. 본론
1)개항초기
서양문명은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동양사회에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부분에서 서양문명은 동양의 정치 지배자들과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서양인들이 몰고 온 증기선과 거기에 비치된 대포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조선사회는 18세기와는 달리 격심한 내적 동요까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영조․정조 등의 현군들이 있어 신하들의 붕당 대립을 억제하면서 왕정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군주들이 계속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것을 틈타 수구세력들이 집단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흔히 세도정치로 불리는 정치형태로 민에 대한 일방적 수탈로 사회적 혼란을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다가온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부친인 대원군이 권력으로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마감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내적 정비를 우선하는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서양세력에 대해 두터운 벽을 쌓았다. 이 상황은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친정에 나선 고종은 개항․개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 아래 1876년 개항을 단행한 다음 1880년부터 개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880년 수신사 파견을 통해 일본의 개화 실상을 확인한 다음, 개화를 주도할 관서로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하고(12월),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 중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을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 소개서들을 포함해 3천여 종 4만여 책의 중국서
참고문헌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평가』, 태학사. 2000
․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國學資料院. 2002
․ 박영수, 『운명의 순간들 -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바다출판사. 1998
․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7
․ 김삼웅, 『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 가람 기획.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