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의 중일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
중국 정책은 '구미협조외교' '경제외교' '중국내정불간섭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시데하라 외교에서 '자주외교' '적극외교' '중국내정간섭정책' 의 다나카 외교로의 변화에 기인한다. 다나카 외교를 만주사변을 계기로 본격화된 대륙의 침략과정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만주사변의 전단계라고 할 수
항일전쟁시기의 중국현대문단
Ⅰ.일본의 중국침략과 만주국의 성립
1.일본의 대륙정책
삼국간섭 이후 만주지역에서 러시아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가 중국에서 획득한 요동반도 조차권을 획득하고, 남만주철도
전쟁이 확대됨
루거우차우(노구교)사건 -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서쪽에 있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노구교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 , 일본이 이 사건을 전쟁 발발의 구실로 삼아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이 발생함
난징대학살중국 본토에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한 일본은 상
러허성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의 군부는 일본 정국을 장악하고 정당내각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군국주의 체재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침략전쟁의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