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바로 되었는가 아니면 잘못되었는가 하는 본질적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지눌 스님에 대한 성철 스님의 비판으로 야기된 이 돈점 논쟁에서 궁극적인 대립 논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이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저에는
마음의 원천에서만 모든 대립된 이론과 쟁론을 스스로 쉬면 선(禪)ㆍ교(敎)의 대립 또한 근원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서 지눌이 겪어야만 했던 고려 중기의 격심한 사회 변동과 그가 몸 담았던 고려 불교계의 여러 문제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일어
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딜까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만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닫고, 깨달으면 곧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돈오의 세례를 받지 않은 점수는 올바를 수행이 될 수 없다.
돈오 이전 의 수행은 “닦음이 없는 닦음”을 해야 한다.
깨달음인 해오로서의 돈오는 선의 시작 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지눌은 해오 대신 점수를 선행의 시작으로 채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이 공(空)함을 모르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몸과 마음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라 하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강조하면서 체계화된다. 이러한 선종을 익힌 도의가 신라 헌덕왕 때 당으로부터 귀국 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지나, 아직은 왕즉불(王卽佛)의 왕권 불교인 교종의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을 펼 수가 없었다.
그 후, 선종은 신라 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