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언제나 사회의 중심이었다. 심지어는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지난 수십 년 동안에도 지식인은 이 사회의 실질적인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건국한 조선시대
여성이 ‘근대’라는 표상아래 등장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신여성이 과연 남성 중심적 담론이 지배적이던 당대 식민지 사회에서 ‘모더니티’의 온전한 한 부분으로 수렴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일례로 나혜석과 같은 급진주의 신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게 되면서 그
민족의 말살이었다. 양민족의 감정과 편견 때문에 크게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지만 법제적 뒷받침에 의해서 1923년 245건이던 일선통혼은 1938~42년 간에 5458건으로 격증하였다.
민족말살의 제3은 일어 상용령이다. 조선어 통역 및 각 급 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다. 일제는 용지절약을 구실로
수 있겠다. 앞서 설명한 1930년대와 40년대의 총체적인 사회변화는 동시기에 쓰여진 그의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통해 낱낱이 묘사되어 있으며, 식민지 지식인으로써의 고뇌와 현실극복방안으로써의 민족계몽주의 등 이태준 자신의, 또는 당시 지식인들이 지녔을 의식구조의 한 단면까지 엿볼 수 있다.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물론 일제하에서 그가 범한 반민족 행위 때문에 그의 공헌, 그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