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독수와 중국공산당원들은 원칙주의에 입각해 당을 조직하고 행동강령을 세운다. 하지만 소련의 국공합작에 대한 지령은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므로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게 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한 지부(地部)로서 소련의 지시를 따라야 했으며,
중국의 지식사회는 사건의 중요성을 심사숙고하였고, 거기서 중국사회의 교훈이 될 만한 것을 끌어내고자 한 사람은 베이징 대학 사서로 있는 중국공산당 및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자인 이대교와 <신청년>의 중심에 있던 진독수였다. 이러한 사상의 급변화는 중국의 국내외적인 요인에 의해 협력, 그리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1927년 8월 중국공산당 무력으로 조직한 남창봉기가 실패한다, 또한 1927년 12월에 수천 명의 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광주 코뮌을 설립했으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 중심의 거점(소비에트)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코민테른의 지시가 잘못된 것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