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와 서양역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광활한 영역에 걸쳐 있는 영토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인재나 영웅의 문제로만 볼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Ⅱ.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시행한 학술·사상의 통일방안.
`분서갱유`란 서
곧 백성들의 파산을 의미한다. 이는 고된 농경과 길쌈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식량 자급과 최소한의 옷도 해입을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책, p.76
이런 대규모 동원 공사로 만들어진 대표적 건축물이 만리장성과 아방궁이다. 하지만 진시황릉의 발굴이 본격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황제체제가 2천여년 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도 바로 군현제적 관료 지배체제가 뒷받침한데서 비롯된다.
또한 진의 통일한 영역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통일을 완성한 진의 국토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는 농경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중국영토의 고정화를 이룩하였기 때
황제가 중국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세우가 된다.
2. 여불위와 진시황제 이야기
전국시대에는 상인들이 각국을 왕래하면서 상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불위도 그중 하나로 그는 천금의 재산을 모은 큰 부자였다. 그가 어느날 상업관계로 조나라 수도 한단에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진나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