却說李鴻章克復蘇, 常的時候, 左宗棠在浙, 亦屢獲勝仗。
각설이홍장극복소 상적시후 좌종당재절 역루획승장
각설하고 이홍장이 소주와 상주를 극복할 시기는 좌종당은 절강에 있어 또 자주 승리를 얻었다.
宗棠自克復遂安後, 嚴州一帶, 依次肅?。
종당자극복수안후 엄주일대 의차숙청
좌종당이
전투가 진행되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동문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이 적의 탄환을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그가 죽기 전에 경상우도병
전투에 패배하여 삭직되는 등 임란을 체험한 윤국형은 문소만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모두 떠나고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높고 낮은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적들의 손에 몸을 더럽힌 자가 몹시 많았다. 이
Ⅰ. 서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의 역사왜곡은 늘었고 우리는 우리 민족감정에 앞서 우리 민족정서에 크나큰 상처를 받고 있다. 우리 역사를 날조하고 침해하며, 반성해야 할 과거사를 합리화하는 이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발굴조사하고 그 내력을 파악해 우리 민족의 정체
전투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끝났다. 그럼 들어가기에 앞서 행주대첩이 일어난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덕양산 정상에 지어진 행주산성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이 이치(梨峙)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