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런데 과연 이 돌멩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본군에는 최신식의 무기인 조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행주대첩에 대해 살펴보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군 3만 명 대 조선군 2천 3백
화약무기가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그 중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시한폭탄은 임진왜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외에도 승자총통(勝字銃筒)과 화승총, 쌍혈총통(雙穴銃筒) 등 많은 화포가 사용되었고 화차 역시 계속 발전하여 임진왜란시기 행주산성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북방의 야인들을 꾸준히 토벌하여 그들이 위협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예방했고 남으로는 왜구들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편전과 총통을 기반으로 한 무기체계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구가할 수 있었던 평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북방의
서론
왜 조선시대인가?
조선시대는 다양한 무기를 접할 수 있다.
근대화의 전시기로써는 가장 발달된 무기를 소유.
3대대첩을 선정한 이유?
조선의 3대대첩은 조선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전쟁으로써 조선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3대 대첩이란?
진주대첩행주대
행주산성 공격에 나섰다. 여성까지 합세하여 1만명의 인원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던 전투는 오전5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군은 서울로 철수했다.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을 후 2월15일 이여송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류성룡은 조선왕조 대대로 왕릉이 있는 곳인 경기도의 회복이 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