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런데 과연 이 돌멩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본군에는 최신식의 무기인 조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행주대첩에 대해 살펴보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군 3만 명 대 조선군 2천 3백
1단원 한국사의 바른이해
1.1 역사의 의미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
행주산성 공격에 나섰다. 여성까지 합세하여 1만명의 인원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던 전투는 오전5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군은 서울로 철수했다.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을 후 2월15일 이여송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류성룡은 조선왕조 대대로 왕릉이 있는 곳인 경기도의 회복이 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