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수용과 발전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박해를 살펴보면서 천주교의 수용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들을 다루고자 한다.
2. 초기 천주교의 전래와 수용
1) 천주교서와 조선인의 만남
전통적 유교사회인 조선에 천주신앙이 수용되고 교회가 생겨나는 것은 정조 8년(1784)의 일이다. 조선에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조정의 탄압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 갔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갔고 창서 직후부터 일반 민중을 위하여 한글 교리서를 번역하여 보급했다. 또, 당시 신자들은 박해시대의 교회에서는 순교자들
조선교구 신자들에 대한 박해에 대해 신속하고도 확실한 일격을 가하여 보복과 보상을 이루고 교회와 프랑스에게 유익을 가져오겠다는 명분 아래 이뤄진 것이다. 또 그 명분은 프랑스 외무부와 해군부의 적극적 동의와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프랑스 정부와 황제의 암묵적 승
.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 이론을 이야기 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유교사회의 집권자들에게는 마치 사회주의가 막 태동했을 때와도 같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만한 사상이었다. 『조선 후기 유교와 서학』 금장태, 서울대학교 출판부
성교요지의 목적
사업은 칼빈(J. Calvin)이나 녹스(J. Knox)가 표현한 "교회 옆의 학교"라는 말이 조선에 있어서는 "학교 옆의 교회"라는 말로 대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 한국은 고종이 공포한 「홍범14조」와 「교육입국조서」에 잘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근대교육을 추진함으로써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