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 체결 이전에는 중국과 여러 외국간에는 대등한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으로서는 외국과의 관계란 외교도 무역도 아니고 대체로 조공관계(朝貢關係)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지배계층(士大夫)의 의식 속에서 강하게 살아있는 의식은 중화사상 혹은 천하적 세계관이었다.
중국은 淸初부
19세기 말 만주족이 세운 왕조인 청나라는 안으로는 관리들의 부패 농민들의 봉기와 더불어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과 제 1,2차 아편전쟁 태평 천국 운동 등이 일어나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 하기 그지없었다. 1900년 봄부터 여름을 정점으로 북중국을 석권하여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준 의화단 운동은,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필요성은 이미 북학파 실학자 인 박제가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또 개항전에도 김정희(金正喜), 박규수, 오경석 등 일부 선각자들은 청 의 양무운동과 양무론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견을 일부 청년들에게 전파하고 가
-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던 2000년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후 4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에게 있어 지난 100 여 년은 전혀 정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법과의 최초의 조우라고 할 수 있는 만국공법(萬國公法) 萬國公法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첫
1.아편전쟁의 배경
(1) 아편전쟁의 내재적 요인
청조가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안정을 찾고 정통성을 구축한 강희대부터 옹정, 건륭대까지의 ‘태평성대’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이완현상을 보이는 것은 건륭중기 이후부터이다. 그러한 현상은 다음 몇 가지 사항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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