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
동대문 일대에서 나름의 상권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1890년 전후로 서울 상권은 전통적인 시전과 이에 맞서는 새로운 서민상권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1899년에는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노선이 완공되어 동대문 일대와 종로 4,5가 상권이 연결됨으로써 상설시장으로 발돋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
청계천 자체는 방치가 되어서 더러운 오폐수가 흐르는 하수구와 같이 변함
ㅁ. 1918년부터 청계천 정비사업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식민 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일환
ㅂ. 조선의 지배 공고,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화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