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핵심인물이던 이동휘(李東輝)는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선출되었다. 정부가 구성되어 교포사회를 직접 통치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입법기관인 국민의회는 실제로 구성되어 있어서 뒷날 상해 임시정부와의 통합교섭의 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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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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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1920년대에 접어들어 전국적으로 청년운동단체가 급속하게 양산됨에 아울러 광주지역에서도 청년단체가 연이어 조직되었다. 1920년 최초로 ‘광주청년회’(이하, ‘광청’으로 약칭함)가 결성된 데, 이어 ‘광주기독교청년회’와 ‘송정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운동 직전까지 수원교구에서 傳敎師, 共宣員, 典制員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탑골공원과 태화관의 상황을 연락하였으며, 수원과 남양 제암리에서 3.1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天道敎靑年會 水原支會를 창립하고 초대 支會長으로, 천도교중앙총
Ⅰ. 1910년대의 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에서 박용만 등이 제기한 ‘정부’수립론은 국외 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노동운동사에서 1920년대 전반기가 노동운동의 형성기라 한다면 그 주체는 지식인과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직 근대적 대공장이 설립되기 전이어서 노동자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사람의 수효는 적었고 노동자의 유형도 자유노동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