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1910년대의 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에서 박용만 등이 제기한 ‘정부’수립론은 국외 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
운동으로 인식해 온 경향이 있다. 이는 지난 50년간의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더 굳어지게 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광주 학생들에 의해 먼저 투쟁의 봉화를 올렸지만 이에 호응하여 항일 투쟁의 돌파구를 찾고 있던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한 전국적인 범위의 학생독립운동이었다. 또한 광주
(1922년까지) 이후 소작권 이동 반대투쟁
4. 전남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1923년 가을 암태도 소작회 결성, 소작료 4할 요구 쟁의 전개. 1924년3얼-7월 지주와 경찰을 상대로 한 농민투쟁이 전개, 동아일보의 지원과 전국 노동, 농민, 청년단체의 지원활동, 일제 경찰의 중재로 소작료 4할 획득하였다.
재일조선인들 모두가 조총련계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 필요가 있다. 일본에 우호적이고 미국에 종속된 남한을 보며 조선국적을 지킨 그들은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닌 통일을 염원한 사람들이다. 해방 직후 3.8도선의 경계가 그어진 조국을 보며 식민지 시절만큼이나 혼란스러워 했
, 이어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두 선언이 함축하는 의미는 달랐지만 전자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을 통한 민족해방투쟁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후자는 전제주의를 이긴 민주주의의 자유, 평등사상을 등에 업고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