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72년, 로마로 귀환하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원로원의 명령에 불복하고 군대를 도시 주변에 배치하면서 서로 연합하게 되고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카이사르 역시 군사적인 업적을 쌓고 정치에 입문했다. 카이사르는 BC60년에 원로원의 감시를 받던 폼페이우스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왕국ㆍ시리아왕국ㆍ아이톨리아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빙키아(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 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 원로원(Senatus) : 초기 귀족300명으로 구성.(카이사르 때는 900까지 확대). 종신임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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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회 : BC5세기 후반(BC471) 푸블리우스 법에 따라 평민회는 부족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재산정도에 상관없이 귀족이나 평민 모두 참석하였으며, 호민관이나 집정관, 법정관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었다. 입법권은 없었으나, 켄투리아회나 원로원에서 인준된 법안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로마시의 행정영역에는 해안의 리도디로마, 국제공항이 있는 피우미치노 및 아직 택지화가 진척되지 않고 로마 평원의 자취가 있는 서부의 구릉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아페니노(Appenines)산맥이 남북을 관통하고 있으나 사실상 정치적 통일에는 큰 장애가 아니었을 것이다. 산맥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