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신라시대 토기의 전반적인 변화
6세기 중엽이후 (진흥왕대)에 고구려, 백제의 돌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유개합 有蓋盒)이 나타나는 것이다.
통일신라토
토기(Earthen ware)란 원래 섭씨 700-85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운 것을 말하며 점토를 성형해서 소성했지만 유약을 입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토기에 대한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와기(瓦器), 옹기, 질그릇, 등으로 달리 불렀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즉 신라의 와(瓦)박사가 일본에 넘어가 도
Ⅰ.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의 전제왕권
이기백은 신라 전제정치의 성립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해온 바가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국사강좌』1 (고대편)가운데 담당한 제 5장 <통일신라와 발해의 사회>의 `전제왕권의 확립`이란 소절에서 정리 제시되었다. 여기서 이기백은 태종무열왕이 상대 등
Ⅰ.머릿말
우리나라 도자기 문화에서 통일신라토기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첫째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물리치고 정치적인 통합을 이룬 뒤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의 영토 내에 통일된 생산 기술에 의한 통일된 기종과 양식의 토기를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통일신라는
토기는 삼국시대 신라토기의 모체가 되었으며,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이키 섬〔壹岐島〕·기타큐슈〔北九州〕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도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일본의 경질도기인 수에기〔須惠器〕의 번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삼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