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탈로찌 일가에 봉사하면서 페스탈로찌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후에 페스탈로찌는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1781)」,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자녀를 가르치는가(1801)」 등의 교육소설 또는 교육이론서 등에서 모성들의 위대한 교육적인 힘을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여성의
페스탈로찌는 청소년에 대한 좋은 교육으로 이 사회악을 제거하려면 교사 및 유지들의 공동의 투쟁과 원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기 위하여는 개인의 투쟁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오로지 국민 중의 식견 높은 사람들과의 결합으로, 국민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도덕력을 형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슈탄츠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된다. 이 고아원에서 그는 자신의 『은둔자의 황혼』에서 보여주었던 평등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교육을 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적 주장을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즉, 도덕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고 여겨졌던 가난하고 버림받은 고아들도 교육적 사
교육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고아와 같이 먹고 같이 마시고 같이 자면서, 그 벌려진 고아들속에 깃든 하나님이 주신 찬란한 인간성의 힘을 발견하고, 그 힘을 키우는 교육에서 자기 사명을 발견하다. 이 때의 실천기록이 ‘쉬탄쓰 고아원통신’이다.
이후 그는 여러 곳에서 농민의 자녀를 위한 새교육
인간에 대한 신념, 인류에 대한 사랑, 종교적 삶의 의미를 성장 과정에서부터 형성할 수 있었다.
페스탈로치는 취리히의 초등학교와 라틴어 학교를 거쳐 취리히 문리대학에서 고전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독일어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콜레기움 카리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