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상황
허균은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살았다. 이때는 조선조가 중기로 접어든 때였다. 조선조가 세워진 뒤로 중기까지에는 태종과 세종의 손에서 내정의 바탕이 굳게 다져졌고, 또 왜구와 북방 민족의 침입이 크지 않아서 나라의 기틀이 튼튼해졌으므로 비교적 태평스러운 세월이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께서는 20세에 의지하는 바를 잃어, 질병(疾病)에 걸려 병이 걸린 와중에도 『심경』(心經) 『심경』(心經): 宋나라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1234년에 제작되
폐모론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여 인조 반정 후에 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천민 신분이었으나 본래 성품이 소박하고 깨끗하여 착한 일에 부지런했으며 시 공부를 좋아하였다. 시에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단에서 알아주는 시인이 되었고 사대부들과 교류하였다. 교산(蛟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면서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에 의해 폐위당했다. 그래서 광해 뒤에 '군'이 붙게 된 것이다. 광해는 실리ㆍ중립 외교를 통해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국익을 챙긴 현명한 군주였고,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을 챙긴 어진 임금이기
대한 압박은 계속되다가 1617년에 이르러 이이첨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사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대해 신하들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다. 같은 대북인이었던 정인홍은 역시 이때에도 전은론(全恩論)을 펼치면서 국모에게 벌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폐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