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아테네의 몰락을 직시하면서 정의로운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치에서가 아니라 교육에서 찾았다. 이러한 플라톤의 새로운 방향 모색에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컸다.
아테네에서 30인 독재 지배가 끝나고 민주 지배 체제가 들어서자,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재판에 회부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덕(德, arete)과 피타고라스가 강조한 생명을 주시하였으며, 교수와 학습의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가 60세 (BC 367)되던 때, 젊은시절 만났던 친구 디온의 초청을 받아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하기 위하여 다시 시칠리아로 갔다. 플라톤은 자신의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적으로, 나쁜 사람을 친구로 잘못 인식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이러한 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들로서는 친구들에게 해롭도록 하고 적들에게는 이롭도록 해 주는 것이 올바르게 되어있다는 뜻이므로 결국 폴레마르코스가 내린 올바름의 정의가
않은가!"
본론
- 소크라테스의 국가관
소크라테스의 국가관은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 중에서 플라톤의 국가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자신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가득했다. 그런 만큼 소크라테스에게 국가는 많은 의미를 가진다. 교재
죽은 후에도 후세 사람들에게 그에 대하여 증언하고 사색하도록 하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죽어간 그것 때문에 그를 영원히 위대한 철학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이전, 자연철학자의 사상은 이 우주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