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이 시급히 국내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싸전트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싸전트는 광복군의 국내진입문제를 즉각 곤명에 있는 OSS본부에 보고하였다. OSS측이 작성한 ‘독수리작전 8월 월례보고서’에 “육군대위 싸전트의 제안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승리
1.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창립
임시정부는 독립군 창설 준비를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1919년 9월 11일 공포된 통합임시정부의 임시헌법에서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사제도를 헌법상 정립했으며, 임시정부 수립직후 상해에서 군사학교를 세워 6개월 속성과정으로 1920년 5월 8일 제 1회 졸
독립군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독립운동 전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의견으로 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적인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40년대 이후 미국, 영국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에서 보여준 광복군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고, 그들은 국내 정진부대를 조직하여 훈련까지 하였다.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의 남북분할론이 열강들 사이에서 대두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넷째로, 제 2차 세계전쟁이 추축국의 패망으로 기울면서, 연합국은 식민지처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미국이 아시아의 일본의 식민지처리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이 과정에 한국의 처리문제도 대두되기 시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