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이후 만주, 연해주, 미국 등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물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또 꾸준히 독립투사들을 키워냈다. 물론 국내에서도 비밀 결사들의 활동도 있었기에 1920년
그에게 큰 불행이었지만, 그 결과 그는 항일투쟁기간 중 일제의 회유공작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과 환경을 가지고 김일성은 이후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및 중국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의 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운동 이래 최대의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국내 노동자•농민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활발한 독립군활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
활동하고 있던 거의 모든 단체를 해산시키고, 신문과 잡지 등 출판물을 강제로 폐간시켰으며 대신 매일신보, 서울프레스, 경성일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어용신문을 새로 발간하는 등.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한국인들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교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