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그런데 예송논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단순한 학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정권의 교체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며, 그 과정과 결과에서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대표적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인조 반정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는 선조 vs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신들
임진왜란 후 광해군 왕위 오르자 신성군 총애 세력과 광해군 지지세력 대립
대북파(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vs 서인(철저한 대명 사대주의)
서인 세력중심인 능양군 무력 정변 > 능양군(후 인조) 왕위 등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