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학문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그런데 예송논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단순한 학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정권의 교체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며, 그 과정과 결과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회상을 살펴볼 수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야했다. 때문에 17세기 지식인들의 사상,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학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후기 사상계의 성격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를 살펴볼 수 있는 주 키워드는 정치사 이다. 정치사 안에 경제, 문화, 전쟁, 사상등 주요 쟁점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조선의 당쟁, 붕당정치는 이미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져 일반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이것은 조선의 멸망과도 결부되는 문제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인조 11년(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당시 과거시험관으로 우암의 답안 내용을 격찬했던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이
정치적 위상에 관한 연구: 중종 10년(1515)에서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이전까지」 『한국정치학회보 32집 2호』, 1998년, p. 75.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 조광조와 더불어 김식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인사경력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이들은 짧은 기간에 고속 승진을 하였고, 직책 또한 ‘언론·논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