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에게 일제의 식량공급기지, 상품시장, 대륙침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는 1910년 총독부를 세우고 무단통치를 펴나기 시작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잔혹하게 진행됐던 무단통치를 통해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고 식민지 종속경제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 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 노동자가 된 사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에서의 패전국의 식민지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뒤늦게 참전하여 전승국의 대열에 끼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민족의 독립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강력하고 억압적인 일제 통치에 순응하는 것 아니면,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래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독립운동은 기껏해야 ‘복국(復國)’, ‘복벽(復僻)’에 그쳤다. 새로운 근대적인 국가와
한미한 농촌선비
1887년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이후 서당훈장을 하던 조부아래 수학하고 성장함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한편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한편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입수된 신서 개화사상을 공부, 개화자강론자로 변모
1901년 <문동학교>에서 교육계몽운동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