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삼가 황제의 칙
이성계가 고려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우왕6년(1380)에 하삼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한 일이었다. 아군의 수보다 무려 10배 이상 많았던 왜구를 크게 격파했던 이 싸움의 이름은 황산대첩으로써, 당시 이성계의 나이 45세였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1.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그를 도운 사람들
1)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조선건국의 과정
1. 고려말의 정세
1)내부: 권문세족에 의한 토지겸병으로 백성들의 생활 궁핍과 국가재정의 위기.
2)외부: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성계와 최영의 성장
2. 이성계의 건국과정
친원파와 반원파의 대립→원의 몰락으로 반원파(공민왕파)의 승리
공민왕파는 변방 세력이었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