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중국에서는 동학농민군과 협력하여 활동하였으며, 후에 만주에서도 조선인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봉오동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용맹한 행동을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을 시작으로 독립투쟁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간도참변과 자유시사변을 겪으면서 또 한번의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고 독립군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 충돌로 인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운동 이래 최대의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자유시에 집결된 상태에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존까지 쌓아왔던 독립군내부의 역량(인적, 물적자원 등)이 한번에 괴멸된 사건으로 무장독립투쟁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라 일컫어 지고 있다.
(2)자유시 참변의 배경
일본은 봉오동전투에서의 참패로 그동안 풍문으로만 여기며 무시해온 조선
한국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범민족항일독립운동. )
이때(3.1운동 이후)부터 1920년대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1920-1934 산미증식계획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
-1920.6. 봉오동전투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