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과 인도 식민지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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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한국과 인도 식민지 해방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 제국주의와 조선후기
-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
- 조선과 인도

2. 본론
- 조선 후기의 식민지화
- 우리 나라의 식민지 저항운동
- 우리 나라의 식민지 해방
- 인도의 식민지화
- 인도의 식민지 저항운동
- 인도의 식민지 해방과정

3. 결론
- 두 나라 식민지 역사의 공통점
- 두 나라 식민지 역사의 차이점
- 식민지 역사에서의 아쉬운점과 본받을점

본문내용
2) 조선에서 인도를 본 관점 – 성공적 모델
반식민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하는 강한 인도는 조선의 귀감이요 희망의 빛이었다. 비폭력, 비협력과 같이 서구의 제국주의를 뼛속부터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 지배국가 수장과의 회담과 식민지인과 지배자들 사이의 상호 평등한 원탁회의를 이끌어내는 등의 성과를 보인 인도는 익어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민중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는 동시에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인도의 모습이 말 그대로 모델이 되었을 뿐, 실제로는 인도를 따라서 비폭력주의를 실천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간디처럼 사람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비폭력주의를 이끌어나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도에선 '비폭력주의 평화저항'으로 승화되어 퍼져나갔던 불씨가, 정작 '동방의 불꽃'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폭력사태로 변질 되었다.

3) 조선에서 인도를 본 관점 – 서구화 되지 못한 야만
강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간접적으로 채우기 위해, 인도를 서구에 대비되는 야만으로 깎아내려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이는 심리적 병리현상이었고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단순 복제였다. 비서구적이고 여성적인 간디의 비폭력 투쟁방법도 또한 조선의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간디는 그의 정신과 고귀한 비폭력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 비영웅적인 풍모, 즉 바짝 마른 몸, 가난한 인도농민의 반나체의 옷차림 등으로 ‘소인국의 난쟁이’와 같이 야만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완전독립을 기대했던 간디-어윈 협정이 정치범의 석방과 소금 전매법의 부분적 승인 등에만 국한되자, ‘개짐 한 개를 차고 원탁회의에 원정 갔던 간디 군은 도루 개짐 한 개만 가지고 연말에 고토의 흙을 밟았다’고 폄하된 일례가 있다.

2. 본론

- 조선 후기의 식민지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脫)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공식적으로 정한론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천황 시대의 과두 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였으며, 1905년의 무력을 동반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차례차례 강제로 박탈하였다
1909년 7월에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 내각에서 결정되었고, 1909년 10월 26일에 이에 분노한 한국인 민족주의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지면서 5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한 제국은 일본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천황 직속의 식민 통치 기구인 조선 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6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우리 나라의 식민지 저항운동
3•1운동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을 미개민족시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쫓는 등 갖은 수탈을 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 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한번 불붙은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학살•살인•방화•고문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해외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은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해방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임시정부는 초반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활동에 소득이 없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변에 모였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단독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함경남도 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1920년 6월).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운동 이래 최대의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국내 노동자•농민의 대중운동
3•1운동을 거치면서 크게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노농운동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공장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농민의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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