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건준의 내분과 해체
김병로, 백관수 등 우익인사는 건준의 좌경 독주를 제동시키기 위해 안재홍 부위원장에게 건의하여 건준을 전체국민의 총의에 의한 조직체로 확대 시키기 위한 ’전국유지자대회‘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으나 좌익계열의 강한 반대와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후 유억겸과 강낙
현대사 이후에도 저항과 민족의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② ‘약탈과 수탈’만 존재하는 경제
식민지시기에 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서술이 반침략 운동의 근거로서만 제시되고 있는 점을 문제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국사교과서에서도 ‘약탈’, ‘경제적 침탈
한국근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나간 여운형. 해방 직후의 급박한 전환기에 건국 동맹,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을 일으 켜 민족의 단합과 통일자주정부의 수립을 위 해 헌신한 여운형이었다.
1919년 12월, 34세의 여운형이 동경에서 펼친 독립투쟁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재인식 : 제 연구시각의 종합적 분석을 중심으로」, 동국대 개발논총 4, 1995, pp.209-227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스탈린의 ‘침략적 제국주의’에서 찾았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전쟁은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달린(David J.Dallin)교수의 짧
한국민족이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조직적 활동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 성격이 자생적이고, 자주적이었다는 점이다. 건준은 일반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좌우 연합의 통일전선 세력으로 출발하였으나 각 세력의 정치적 위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한반도 분할정책을 돌파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