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최초의 개항을 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를 필두로 1882년 朝․美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불과 몇 년 사이 여러나라들과 수교하여 1886년 이후에는 동양의 청, 일은 물론 이거니와 서양의 열강이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과도 모두 수교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이념에서 탈피하지 못했음을 드러냄.
② 청일 양국의 외교전략적 측면
청나라 - 이 조약을 일본을 이용하여 중국에 대한 서방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로 봄.
일본 - 이 조약을 한반도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나아가 중국에서 서방국가들이 누리는 지위와 특권을 일본도 획득
설립하고, 만주와 한국에서 광산과 삼림개발을 맡아왔다. 또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삼림 채벌권을 명목으로 1903년 4월 21일 용암포를 불법으로 점령 하였다. 만주를 재점령하고 조선에까지 촉수를 뻗치는 베조브라조프 일파의 동아시아정책은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2. 러일 전쟁이 조선에 미친 영향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영향력 중복 주변부가 수적으로 감소하면서 무력적 수단을 동반한 경쟁구도로 전환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한반도에서 영향력 독점을 위하여 청국과 무력분쟁을 치렀던 일본은 러시아까지 격퇴함으로써 지역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