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으로 민족의 항쟁정신이 계승되어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횃불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를 침략하였고, 식민지지배를 통해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하였는데도, 우리는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교훈을 얻는 것과 식민정책(민족혼 말살, 민족분열)의 치유와
3.2. 항일의병운동
1907년 안중근은 진남포에서의 교육활동과 국채보상회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북간도(北間島)로 향하였다가 일본군이 많이 주둔한 것을 보고 방향을 바꿔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갔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그는 왜 1907년 갑자기 모든 활동들을 접고 연해주로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에는 동의했지만, 당파적 이해와 요구가 결합되면서 완전한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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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항일과 항일투쟁
1910년대 지방유생들의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은 여러 갈래에서 전개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의병투쟁과 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의병운동? 의병전쟁?
운동, 전쟁이라는 개념어 사용에 구분의 기준이 정해져있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정미의병 이후 ‘의병전쟁’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음.
정미 7조약 체결
->정미 7조약의 대한제국의 정규군대는 모두 해산하여야 하며 일반인도 무기를 일체 가질 수 없다는 ‘총포 및 화
체제와 같은 극빈 열악한 비인간적인 상태였다.' '한국인은 그대로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 합병을 해서 세계 1등 국민으로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100만 명이 넘는 일진회가 합방을 요청해 정치적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은 거대한 운동이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