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민주적 정치행태는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였고, 야당의 도전과 투쟁을 격화시켰다. 결국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조종을 알리는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이승만은 1960년의 4월 혁명으로 12년의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제1공화국도 종말을 고한다.
제를 도입하여 제도적 차원의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부분 기여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양인 모두 선배 정치군인이었던 박정희보다 민주주의를 더 많이 배웠다지만, 경제근대화 이후한국정치의 비젼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했고, 재임 중 수천억 원에 이르는 불법 정치자금을 ‘관행’이란 명목
정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형성된 제반 정치적 특성은 한국정치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해 탈식민의 내부적 상황과 냉전이라는 외압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 속에서 접목되면서 분단국가와 정권의 성격이 갖추어져 갔던 국가 형성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해방 직후
등지에서 무력점거를 확산시킨 사건이다.” [ 함석헌. (2003).「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울: 한길사. ]
이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들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제1공화국의 정치적 특징은 이후의 행정체제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