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로 승진 1589~1590
파격적 인사로 전라좌수사에 임명 1591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5월 6일 : 전함 85척을 거느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 모임5월 7일 : 옥포해전, 합포해전5월 8일 : 적진포해전5월 29일: 사천해전-처음 거북
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
통하여 상면을 청하였으나 " 우리는 종친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 " 고 거절하였으니 이는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리라.
국경경비에 3년간 임하다가 훈련원을 거쳐 36세가 되던 해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되어 포구를 수비하셨다.
월에야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35세 되던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36세가 되던 1580년 (선조 13) 7월에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이 무렵에 좌수사
월 22일]<갑술>
<장계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
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 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장지)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
9월 25일 [양력 10월 29일]<신사>
<장계에서> 순천에 사는 전 훈련원봉사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