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관한 심층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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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관한 심층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Ⅱ. 무과제 이후의 관직 생활
Ⅲ. 임진왜란 때의 행적
Ⅳ. 해금의 시대와 이순신
Ⅴ. 이순신의 활동 공간
1. 좌수영 시기(1591년 2월 13일˜1593년 6월)
2. 한산도 시기(1593년 7월˜1597년 2월)
3. 우수영고하도고금도 시기(1587년 8월˜1598년 11월)
Ⅵ. 이순신이 치른 8대 해전
1. 옥포해전
2. 당항포 해전
3. 한산도 해전
4. 부산포 해전
5. 웅포해전
6. 제2차 당항포해전
7. 명량해전
8. 노량해전
Ⅶ. 이순신의 리더십
Ⅷ. 충무공에 관한 논평
본문내용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동쪽의 '마른내길' 근방이며, 그가 탄생한 집터는 현재의 인현동 1가 40번지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1대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11대손 정(貞)이며 평민생활을 하는 양반이었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였다. 어머니 변씨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면서도 가정교육에 엄격하였다.
조선왕조로 넘어오자 7대손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내는 등, 그의 가계는 주로 문관 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그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은 정치적 혼란기에 벼슬을 사양하고 조광조(趙光祖) 등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변을 겪게 된다. 그후 아버지 정(貞)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냈으니 가세 또한 기울어 있었다.
이순신은 희신(羲臣), 요신(堯臣)을 두 형으로 두고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밑으로는 아우 우신(禹臣)이 있었다. 큰형 희신에는 네 조카 뇌(雷), 분(芬), 번(蕃) 그리고 완(莞)이 있었고, 작은형 요신에게는 두 조카 봉과 해가 있었으나, 두 형이 모두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들 여섯 조카를 돌보아야 했다. 그는 조카들에게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였다고 한다. 이순신과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는 세 형제 회, 열, 면과 한 딸을 두었고, 서자(庶子)로는 두 형제 훈(薰)과 신(藎)은 무과에 올랐다. 부인 방씨(方氏)는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데, 이순신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올랐고, 80이 넘도록 살았다.


Ⅱ. 무과제 이후의 관직 생활

22세에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던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말을 달리다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하였다. 32세 되던 1576년(선조 9) 봄에 식년무과(式年武科) 출장하여 병과(丙科) 제4인으로 급제하였다. 등과 하고도 그해 12월에야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35세 되던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36세가 되던 1580년 (선조 13) 7월에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이 무렵에 좌수사 성박(成 )이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 물건을 함부로 베어 갈 수 없다 하여 사람을 돌려보내니 수사가 크게 호통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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