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이후 즉 조선조 후기 여성들은 가부장적 질서에 희생되고 순응해야했다. 조선 왕조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미망인의 개가(改嫁)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 악습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부녀의 재혼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는 새 법령으로
‘열녀’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고전 서사문학에서 가장 폭넓게 쓰여온 소재이다. 문자가 지배계급의 독점적인 향유물이었던 조선 전반기까지 지배계층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배하고 군림하기 쉬운 피지배층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열녀’ 이야기를 ‘전傳’의 형태로 집필하였다
향랑의 이야기가 전승되는 의미
인간은 감정과 경험에 관계된 모든 것을 언어로서 드러내기도 하고, 동작의 표현으로 발화되는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엇에 관하여 말을 하기도 하고, 무엇 때문에 행위를 하고, 전혀 감지 할 수 없는 웅얼거림이나 침묵으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조선 숙종 28년(1702)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 한 여인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향랑이란 양인 여자의 자살로서,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러하였다. 향랑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났다. 열일곱 살에 같은 마을에 사는 열네 살의 임칠봉에게 출가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