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해외 소재 북한자료는 북한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문헌자료와 더불어 해외소재 북한관련 인사들의 구술자료 또한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해외의 각 지역에
허가이의 1953년 7월 암살사건 후에 54년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대량학살로 접어들었으며 김일성은 자신의 정권을 영구히 독재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숙청해야 했고 위조, 즉, 걸림돌 되는 이들로 남한 간부들을 숙청하고 이어 연안간부 그리고 소련간부 마지막으로 지방
허가이는 군사위원이 되지 못했다. 당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허가이가 1951년 11월 당 중추로부터 좌천되면서 이후 군사위원회와 당정치위원은 실질적으로 일치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 망명한 과거 북조선 고위층들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소련의 군사원조를 배경으로 한 북조선의 선제공격설
허가이를 관문주의자, 징벌주의자로 비판하였다. 허가이가 당내의 기본성분을 유지하고 당내규율을 엄격히 하는 데 대해 이를 정면 비판한 것이다. 허가이는 결국 좌천되었으며 이는 소련계의 중심이 없어진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이 과정은 스탈린의 양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소련 측의 의사
허가이의 실각 : 1951년 6월 중순 전선이 교착상태에 들어가면서 통치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통치전반을 총정리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당원재등록사업과정에서 허가이는 유엔군 점령기간동안 많은 당원이 신분을 숨기기위해 당원증을 없애 새로 당원증을 교부하면서 하부 당원들에게 대규모 징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