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 주요 저작] -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서평(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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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서평(3-4장)
1. 내용 요약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3, 4장은 6.25 전쟁과 전시체제, 그리고 전후 경제복구 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에 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6.25 전쟁과 그 이후 경제 복구 과정이 북한이 사회주의적 체제의 길을 가게 되는 결정적인 시기로 보고 그 이유에 관해 북한 지도부의 변화와 여러 정책에서의 변화 등을 들어 입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6.25전쟁 시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중앙집권적인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군사위원회는 전시행정과 군사 부문의 최고의사결정기구였다. 개전 전후의 군 지휘 계통은 근 최고수뇌부를 장악한 만주파와 88특별여단 출신 소련계 조선인과 실제 군작전을 담당한 연안계로 나뉘어져있었다. 북조선 내부의 구체적인 전쟁 결정 과정은 미지의 영역이나 공식적인 전쟁결정은 남한 침략에 대한 반공을 명분으로 내려졌고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의였다. 그러나 무력통일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해 김일성은 자신과 박헌영을 포함, 최고지도부의 책임을 언급하는 대신 각 정파의 간부 및 전선지휘관에게 균등하게 책임을 지웠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었고 11월 당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당조직담당 제일비서 허가이를 관문주의자, 징벌주의자로 비판하였다. 허가이가 당내의 기본성분을 유지하고 당내규율을 엄격히 하는 데 대해 이를 정면 비판한 것이다. 허가이는 결국 좌천되었으며 이는 소련계의 중심이 없어진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이 과정은 스탈린의 양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소련 측의 의사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25 전쟁 시기 당군 관계를 살펴보면 전쟁발발을 전후하여 상당수의 간부가 군에 동원되었고 이는 당을 군에 접근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연안계의 협력 하에 만주파는 전쟁을 장악하고 있었고 소련계가 실무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정규균형 군대와 연안계가 지휘하고 있던 인민전쟁형 군대, 남로계의 유격전형 병력 등 당군 관계 측면에서 북조선 무력의 여러 구성요소는 통일된 제도 하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남로당의 통제를 받고 있던 남한 유격부대는 인민군으로 통합될 수는 없었고 이는 남로계 숙청의 원인 중 하나였다.
한편 전쟁 발발시까지 군내 정치사업은 문화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6.25 전쟁 발발 후 군내 당조직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군내 정치조직상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인민군 패주와 중공군 참전이었다. 북조선과 중국간 갈등 중 하나는 조중연합사령부를 둘러싼 북조선-중국 관계였다. 김일성은 군사적 지휘권을 중국에 인도하고 정치적 통제권도 빼앗긴 셈이었고 박헌영과의 타협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인민군내 당단체가 조직되고 195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원확대정책이 전개되면서 인민군이 당의 군대라는 사고방식도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군사단일제를 원칙으로 하는 한 당지도와의 관계는 계속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파 지휘관 중심의 군사위원회를 설치, 상설화 시킨 것은 김일성이 군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한 것이다.
인민군은 창건작업을 만주파가 주도하여 처음부터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당조직보다 빨치산 출신 전사들을 지휘계통의 축으로 삼아 군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군을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1953년 2월 김일성에게는 원수의 칭호가 수여되었는데 이후 군내 연안계 존재를 암시하는 표현은 사라지고 무장투쟁의 전통을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전통으로 단일화하였다.
‘남조선 해방;이라는 목적에서는 전쟁이 참담한 실패였지만 이를 통해 김일성은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전쟁 책임자는 김일성이었지만 그 책임을 각 정파의 유력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었고 전쟁기간 중 급속히 성장한 당과 군은 김일성의 확고한 권력 기반이 되었다. 허가이, 박일우의 좌천은 내무기관과 군부에서 김일성 견제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이는 박헌영 숙청을 가능케 한 조건이 되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소련, 중국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남로파의 숙청은 결과적으로 정전의 주요 장애를 제거해 준 셈이었다. 인민군의 명령계통 바깥에 놓여 있던 독자의 무장집단이 저항 없이 제거되어 유격전형 부대는 종식되었고 6.25 전쟁의 책임도 남로파에 씌울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2월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는 김일성에게 원수의 칭호를 수여하였고 이는 김일성이 전쟁 실패 책임으로서 면제된다는 것을 내외에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에서 김일성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특히 숙청 작업에서 소련계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스탈린과의 관련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1952년 12월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하부 당, 정권기관에 대한 단속을 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고 숙청작업을 하부기관, 조직까지 확대한다는 뜻이었다.
북조선의 전시체제로의 이행은 단기간 내 신속히 이루어졌는데 노동력 부족 문제는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다. 1950년 초부터 실시된 유일관리제는 공장 내 질서가 전시체제로 이행하는 것을 순조롭게 하였으며 내각 내 경제관련 부서도 전시환경에 맞추어 개편되었다. 그리고 국가계획위원회가 강화되어 인민경제계획 입안 및 복구, 각 부서의 경제계획 실행 상황을 감독, 검열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농업에서 전시체제로의 개편은 공업 부문보다 늦어지고 있었으며 북조선 농업에서 본격적 전시생산체제로의 전환은 중국군이 참전하여 피점령지역을 탈환한 이후였다. 이후 농촌지역에서 통치체제를 회복하고 농업생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노동력의 조직화가 진행되어 증산경쟁운동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 전권대표 파견은 농업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방식으로 일상화되었다. 전시 하 농촌의 공동노력 형태는 전국적으로 행정력을 동원하여 항상적 형태로 고정되었는데 이는 전후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농촌노력 조직의 출발점이 되어 초보적 형태의 농업협동조합으로 변모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생산에 관한 국가 통제는 강화되는 가운데 소비는 주민 자율성이 증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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