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김춘추 등이 숙청되었으며 이들의 숙청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밀주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주된 대상이 김일성의 정치적 경쟁세력에 국한되어 있다. 1952년에는 종파주의의 극복을 통한 당의통일단결을 역설하면서 대대적인 반 종파투쟁이 진행되는데 이때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열이 제거가
위원회나 임시정부등의 정치세력은 철저하게 무시당하였다. 결국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불완전한 해방, 미완의 독립으로 볼 수 있다.
2. 1940년대 우리 민족의 정치지형
우선 김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한국 민주당, 박헌영이 대표주자인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 김일성으로 대표
김일성의 이러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고 김일성을 심하게 비판했는데, 이로써 북한과 중국은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내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
- 4대 군사노선과 군사주의화
중소분쟁을 계기로 북한은 6.25전쟁 때 양국이 보냈던 지원
거창하게 소개되었고,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은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장으로서 양인은 북한과 남한의 지도자로 각각 지명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보다 신화화되고 성스럽게 되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