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원작 부정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라는 선행하는 통설을 비판하는 주장은 1960년대에 들어서 이능우ㆍ김진시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1965년에 이능우는 사서에 담긴 허균의 많은 단처(短處)를 들어 엄청난 단처(小人) 허균을 위대한 작품『홍길동전』과 결부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허
허균의 의식과 가장 접근하고 있는 판본으로 추정된다. 경판 24장본인 한남본은 다른 판본에 비해 그런대로 논리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배불의식(排佛意識)도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후대 영웅소설의 영향의 흔적도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허균의 의식에서 비교적 덜 일탈된 면모를 지니
허균이 문학적 재능을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허균은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에 문과에 합격했으며, 29세에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했다. 춘추관 기주관, 형조 정랑, 사복시 정, 형조 참의 등의 벼슬을 거쳤고, 지방 고을의 군수와 부사를 지냈다. 당시 중국에서 이름을 떨치던 대문호
허균의 스승인 삼당시인 이달처럼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서자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서얼들은 인재의 보고였던 샘인데 서얼차별제도로 인해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전후복구에 힘쓰는 조선에 인재가 절실한 시점인데도 인재의 보고인 서자들을 등용하지 않는 현
가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노비로 있던 사람이 전쟁의 와중에서 출세를 하게 되고, 권세 있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명령 계통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늘어갔고, 여기에 더하여 지방 관장의 수탈은 도를 더해갔던 것이다.
선조 말년부터 서양갑, 심우영 등의 무리는 서자 출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