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보고와 자문을 구하는 자리인 조계, 상참에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의정부, 육조와 함께 입법에 관한 논의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쳤다.
4. 사헌부와 의금부, 사간원의 관계
사헌부는 왕에게 대항할 만큼 막강했기 때문에 견제기관이 필요하였다. 사헌부의 가장 큰
상소
최만리 등 원로학사 → 훈민정음 창제 반대
2.변 천
당대 최고 학자가 되어 정치가 진출 희망
정치진출억제(세종정치자문기구, 집현전학사 양성)
언론활동 통해 그들의 주장 발표
언론기관으로 취급
홍문관 설치되었을 때, 홍문관이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로의 언론기관으로 인정
명칭이 보문각(寶文閣)으로 바뀌었다.
태종대에는 1410년(태종 10)․1417년(태종 17) 두 차례에 걸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집현전 설치 건의를 올렸다. 그 건의의 요지는 ‘치도(治道)의 하나로서 인재를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현전을 설치하여 재능이 있는 젊은 문사들을 모아서 강경
집현전학사들은 유학자이며, 유학은 순수학문이라기보다 사회와 국가의 운영원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현전학사들도 처음부터 순수학자를 원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배우고 연구한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정치가를 지망한 것이었다. ((대간(사헌부와 사간원)이나 정조(이조와 병조)로 진출하기를
조선의 개창과 한양천도
1) 시대 배경
(1) 고려 후기, 토지의 대부분을 권문세족과 사찰이 차지하여 늘어난 농장에 많은 일반 농 민이 궁핍해짐
(2)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실패
(3) 원명 교체라는 새로운 대외 관계 양상에 따른 노선 갈등
(4)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에 따른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