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통신사 부활
앞서 말했듯이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만의 전쟁은 아니었다. 왜란의 이유가 일본측에서 명으로 가는 길을 트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고 조선에 군사를 보내 전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렇게 명이 조선 땅 위에서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만주지역에
고려에서는 1375년부터 왜구문제로 다섯번에 걸쳐 외교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때 사절단의 이름이 통신사였다.
조선초기에도 조선은 계속 왜구 문제로 보빙사와 회례사라는 이름으로 일본과 사절을 교환하였다.
교린체제의 개편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조선은 피동적으로 스스로
1. 사대교린의 의미
조선시대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정책이었다. 즉 명나라에 대한 사대정책과 일본, 여진, 유구에 대한 교린정책을 취하였다. 조선이 이러한 정책을 펼치게 된 것은 중국 대륙의 압력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고 인접국가와의 화평을 유지하기 위함이였다.
2. 다원적이고 중층적인 관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여우길을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 이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친구의 나라 즉, 교린국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견했기 때문이다. 이 “쇄환사”는 그 후 1617년, 1624년 2회 더 계속 되다가 1636년 제4회 째부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다. 포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의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인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한 것이 시초이다.
But.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
+갖춰야하는 조건*목적
첫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