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 통신사에 대한 조선, 일본에서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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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학] 통신사에 대한 조선, 일본에서의 인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서론
2. 통신사의 연원과 시작
1) 통신사의 기원-보빙사와 회례사
2) 본격적인 시작
3. 임진왜란 이후의 통신사
1) 재개-탐적사와 회답겸쇄환사
2) 통신사의 부활
4. 통신사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상호인식
1) 통신사의 일본 인식
2) 일본의 통신사 인식5. 결론
본문내용
2)통신사 부활
앞서 말했듯이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만의 전쟁은 아니었다. 왜란의 이유가 일본측에서 명으로 가는 길을 트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고 조선에 군사를 보내 전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렇게 명이 조선 땅 위에서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만주지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었고 후금은 점차로 세력을 늘려 서서히 명과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사대교린정책에 안착해있었던 조선은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종래의 대명관계를 고수했다. 그러나 후금의 세력은 계속 팽창하였고 이러한 후금과 군신관계를 격렬하게 거부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왜란으로 인한 충격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 조선은 참패하여 후금과의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내면에서는 후금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는 소중화 사상이 견고해졌다.
이러한 대중관계의 변화하자 조선의 대일정책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대일 교린체제도 개편해 갔다. 즉 이때부터 조선의 교린정책은 청을 견제하고 대비하기 위한 탈중화적인 교린체제를 수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신사의 부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 났다. 물론 직접적인 통신사 파견의 이유는 1636년 일본측에서 일어난 ‘국서개작폭로사건’과 일본측 내정에 관련되어있었다는 점에 의해 교린체제의 개편이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고 조선은 피동적으로 스스로에게 불리한 교린체제를 받아들였다는 의견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의 입장으로는 북방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일본과의 우호관계 유지는 국가안위에 절대적인 선행조건이었다. 그러므로 통신사 파견의 문제를 이러한 정세를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1636년 통신사는 동아시아 국제환경의 격변 속에서 조일 양국 서로가 청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외교체제를 수립한 국제적 사건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으며 나아가 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