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였다. 한자는 고대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주변 민족들 사이에 퍼지는 과정에서 맨 처음 뿌리를 박은 것이 우리 나라였다.
한자의 수입은 중국과의 언어 접촉의 결과였다. 이 접촉의 초기에 있어서는 아마도 단어의 처용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중국
성리학이 통치 이념이었고, 성리학의 기본 이념이 민본주의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이 바로 한글이다.
또, 세종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고 했는데, 이는 실용 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인지는 다음과 같이 한글의 편리함을 부연 설명하고
훈민정음이 한자와는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기원이 어느 문자보다도 분명할 것 같은데, 실상은 원본이라고 할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문맥상 모호한 점 때문에 다양한 기원설이 나오고 있다.
현재로선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발음기관을 상형해 독창적으로 창제
훈민정음은 위구르 문자나 만주 문자처럼 남의 겨레가 사용하는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그것에 약간의 변개를 가하여 사용한 문자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자들이 문자 발달 과정에서 볼 때 일종의 계보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훈민정음은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파스파 글자까지 결부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훈민정음의 음소문자적인 성격은 몽고 글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고, 음절 단위로 글자를 표기하는 방식은 한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다. 이 외에도 태극사상 기원설이나 창문 상형 기원설, 기-성문도 기원설 등 다양한 기원설이 존재한다. 강신항, 『수정증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