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공정한 평가는 어렵다.
흥선대원군
당시 열강들이 아시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시장 개방과 교역’이었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적 성장은 각국이 국력을 지니는 데 큰 역할을 했으므로 경제적 관점에서 대원군의 정책을 고찰해 봄도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패배감을 맛보고 자본주의를 택하
고찰하려고 하는데, 명성황후 자신의 저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 또한 매우 희소하므로 기존 선행연구자들의 결과물을 검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필요한 자료와 목록을 인터넷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검색한 후 관련 문헌을 통한 기초 조사를 하였다.
본 연구의 고찰 범위를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내일을 여는 역사 23호/서해문집/2006.3
이에 대원군 집권시기의 세계정세 및 국내 상황을 분석해보고 그에 대응했던 대원군의 주요 정책들 특히 이른바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론과 옹호론을 각각 고찰하여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의 비교함으로
Ⅰ. 흥선대원군의 생애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 남연군구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아버지다. 철종때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과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파락호의 생활을 하였다.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