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19c 조선의 정세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에 대한 새로운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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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19c 조선의 정세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흥선대원군의 삶과 정치
Ⅲ 흥선대원군의 일반적 평가
1. 흥선대원군의 상반된 평가
2. 경제논리로 본 흥선대원군
3. 메이지 유신과 쇄국정책
Ⅳ 조선의 입장과 역사적 배경
1. 조선의 외적 상황
2. 조선의 내적 상황
Ⅴ 흥선대원군에 대한 민중의 반응
1. 역사적 기록
2. 민중의 행동
Ⅵ 새로운 관점에서의 해석
1. 쇄국의 의미
2. 조선 망국의 원인
3. 진보의 의미
Ⅶ 21세기와 쇄국정책
Ⅷ 결론


본문내용
Ⅱ 흥선대원군의 삶과 정치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 뽑기 위해 사창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에 대한 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으로 은퇴하였다.‘흥선대원군’,『네이버 두산백과』, 접속: 2008.03.18


Ⅲ 흥선대원군의 일반적 평가

1. 흥선대원군의 상반된 평가
앞서 언급했듯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는 두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당시 국세정세에 관한 안목이 부족했고 그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에서 이러한 정책을 택하였다고 말한다.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폐쇄적 외교노선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망국의 원인이라는 경향이 있다. 이덕주,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에디터, 2004), p 90
요즘같이 국제화, 세계화가 이야기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명성황후와의 외교노선관의 차이로 인한 감정적 대립과 권력욕(왕의 아버지로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린 세도가라는 비판)으로 인해 세계정세에 눈이 어두워 무리하게 쇄국정책을 폈다는 주장도 있다. 최용범,『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서울:페이퍼로드, 2007), pp 314~315

이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대원군은 단지 양이(攘夷)해야 보국(保國)한다고 생각했을 뿐 부국강병을 생각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펼 생각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대원군의 양이 보국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질서유지’였다는 의견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조국 방위 전쟁과 근대적 민족 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선호,『한민족의 국난극복사』, (부산사학회, 1979) p177


2. 경제논리로 본 흥선대원군
당시 열강들이 아시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시장 개방과 교역’이었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적 성장은 각국이 국력을 지니는 데 큰 역할을 했으므로 경제적 관점에서 대원군의 정책을 고찰해 봄도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패배감을 맛보고 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는, 세계 각국이 교류와 경쟁을 하고 있는 현재의 시각에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평가한다면 당연히 부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근대화,
참고문헌
강동진, 일본근대사, 1985
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1, 2007
구로역사연구소, 바로 보는 우리 역사, 1990
김육훈, 쟁점으로 본 한국사, 1999
박 현,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1997
이덕주,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2004
이선호, 한민족의 국난극복사, 1979
이이화,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 열강, 2003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2007
허동현, 우리 역사 최전선, 2003
안외순, “대원군집정기 정치적 지배세력에 대한 연구”, 1989
“흥선대원군”, 네이버 두산백과, (2008.03.18 검색);
available from World Wide Web @ http://100.naver.com/100.nhn?docid=17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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