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 는 단호한 결의로 47개소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습니다. 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
한국의 근대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었다. 조선 시대 말부터 국운이 기울어 일제에게 국토를 강탈당하기 전까지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 간 것이 이 둘로 대표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명성황후는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했고 흥선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
것이었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서양 열강들의 개척 시장의 대상은 멀리 있는 약소국들이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그 초점이 되었다. 조선의 주변 국가였던 일본과 믿었던 중국마저 힘으로 서양 열강들에게 굴복하고 문을 열었던 국제 정세 속에서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었다.
Ⅰ. 흥선대원군의 생애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 남연군구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아버지다. 철종때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과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파락호의 생활을 하였다.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