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요약
<제12편 百濟의 强盛과 新羅의 음모>
제1장 扶餘成忠의 위대한 계략과 백제의 拓也
부여성충(扶餘成忠)은 백제의 왕족으로 지모(智謀)가 뛰어나 예(濊)의 침략 시 기묘한 계책으로 적을 물리치니 기원 645년,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그를 불러 나라의 강성을 위해 고구려와의 관계와
金庾信)장군 인솔 아래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인 화랑 관창(官昌)·반굴(盤屈)의 용맹과 672년 김유신의 아들인 화랑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唐)나라 군사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널리 알려 져 있다.
▣ 지도이념 :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김 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여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함.
645년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 -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등이 이를 진압하였다
,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까지 함락당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 -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김 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여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함.
金庾信)을 후원하여 세력 균형이 깨지게 되자 역전을 기도한 반란사건이다.
③ 왕군은 월성을 근거지로, 반란군은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군사적 충돌을 시작했으나 10여 일이 지나도 승패가 나지 않는 등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 상대등(上大等) : 법흥왕 18년(531) 처음 설치된 이래 왕 다음으로